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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조용한 럭셔리의 부상

발행 2023년 05월 03일

어패럴뉴스 , appnews@apparelnews.co.kr

김홍기의 ‘패션 인문학’

 

법정에 출석하는 기네스 펠트로

 

브랜드는 인간이 특정한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서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에 기반을 둔 자산이며 이런 점에서 브랜드 관리란 결국 의미 관리의 과정이다. 최근 패션계에서는 '조용한 럭셔리'가 뜨고 있다. 정의하자면 큼지막한 브랜드 로고 노출을 최소화하고 옷의 맞춤새와 소재에 집중하는 패션 트렌드이다. 최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억만장자 배우인 기네스 펠트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고가 보이지 않는 무채색 톤의 디자이너 옷차림을 하고 법정에 선 모습이 공개되며 언론은 그녀의 조용한 사치를 대서특필했다.

 

복식사를 긴 호흡으로 읽는 필자에겐 ‘조용한 럭셔리’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18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로 부르주아들은 사회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권력과 부를 쟁취했다. 이들은 프랑스 왕정의 몰락과 함께 산업자본가로서 사회의 지도층으로 부상한다. 이때 이들이 내놓은 전략이 ‘위대한 남성성의 포기'이다.

 

18세기 전까지 남성복은 여성복보다 화려했다. 6개월 이상을 들려 금사를 이용해 놓는 꽃무늬 자수와 브로케이드 원단으로 만든 슈트, 레이스 소매와 취향 경쟁을 불러일으킨 단추에 이르기까지 남성복은 여성복의 화려함을 압도했다.

 

그러나 남성성의 포기라는 사회적 합의와 함께 남성들의 옷은 어두운 색감의 모직물을 이용한 슈트, 간소한 액세서리로 굳어졌다. 이런 옷차림들이 상업 활동을 통해 사회적 성공을 꿈꾸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신중함과 절제라는 내적 품성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영국을 떠나 신대륙인 미국을 개척한 화이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트(WASP), 즉 백인 청교도였던 동부의 엘리트 집단들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청교도주의와 결합된 그들의 소비는 미세한 차이를 빚어내는 고품질의 직물을 생산하는 데 열을 올렸고 미국이 직물산업의 강자로 부상하는데 토대가 된다.

 

이후 미국 산업혁명의 여파로 엄청난 돈을 번 신흥 부자들은 청교도 정신과 작별하며 일상에서 온갖 사치품으로 자신을 도배했다. 이들은 현대의 로고 마니아들이다. 이 시대를 도금시대(Gilded Age)라고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가깝게는 경제적 활황이었던 1980년대 오늘날 명품 브랜드의 로고 전쟁이 벌어졌던 것을 생각해 보자. 그 뒤를 이은 1990년대 경제는 다시 어려워졌고 도나 카란과 미우치아 프라다의 실용적인 옷차림이 다시 유행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부유층은 은밀하게 부를 과시했다. 고품질의 주요 품목에 투자하면 오래 입고 낭비를 줄일 수 있어서다. 최근 조용한 럭셔리의 분위기에 편승한 로에베와 생 로랑, 미우미우 등 평소 화려했던 브랜드들도 클래식한 감성에 기대며 이번 시즌에서는 은밀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제품들을 내놓았다. 지금껏 조용한 럭셔리를 표방해온 제냐, 더 로우, 로로 피아나와 같은 브랜드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2022년 매출이 무려 29.1% 가 증가했다.

 

조용한 럭셔리의 부상에는 패션의 캐주얼화와 매스티지(Masstige: 준 명품)시장의 성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일단 우리의 옷차림의 코드 자체가 가벼워졌다. 사회 전반의 캐주얼화는 정장을 선택의 후위에 놓고 있다. 매스티지의 인기로 인해 부유층에게는 은밀하게 명품의 우월성을 보여줄 제품이 필요해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질감과 소재, 장인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부유층의 내면을 ’저공비행‘하는 스텔스 럭셔리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뜻하는 단어 Urban은 ‘완곡어법’을 뜻하는 라틴어 Urbanus에서 왔다. 도시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각 계층이 자신의 지위와 부에 맞는 말투와 제스처, 매너와 옷차림을 선보이는 방식은 ‘대놓고 자랑하는’ 방식에서 ‘은밀하고 섬세하게’ 변모해왔다.

 

인간이 자신의 위대함을 공표하는 방식은 ‘완곡적인 우회’를 통해 대중을 설득해온 것이다. 조용한 럭셔리가 뜨는 데는 죄가 없다. 우리는 항상 저음과 고음의 어느 중간, 균형점을 끊임없이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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