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광의 '인생이 패션'
 |
| 이미지=챗GPT |
10년 전 영국에서 석사를 하며 잠시 거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10주년을 기념하는 마음으로 다시 영국에 와 있다. 내가 머물던 곳은 레밍턴 스파(Leamington Spa)라는 지역이다. 몇 걸음만 걸어도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백인 거주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이고, 거리의 표정과 생활의 리듬이 '영국적'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을 만큼 선명하다.
다시 와서 보니,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건물은 정돈돼 있고, 카페의 메뉴는 조금 더 다양해졌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태도와 속도, '생활을 대하는 방식'은 여전히 같은 결을 유지한다.
어떤 면에서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업적과 시스템을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밀어두는 것, 그 작은 누적을 반복해 시간의 축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이들의 미션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지점에서 경쟁력이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급격한 혁신이 아니라, 끊임없는 관리와 축적. '바꿀 것'보다 '지킬 것'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반대로 한국은 다른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K팝, K패션 등 문화적 파급력을 등에 업고 세계 수면 위로 빠르게 올라왔다. 그 속도는 분명 우리의 장점이자 힘이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빨리빨리'와 '전 세대와의 단절' 같은 정서가 깔려 있는 듯도 하다. 이전의 것을 충분히 다듬어 축적하기보다, 다음 장으로 빨리 넘어가는 것이 더 익숙했던 나라. 어쩌면 그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지만, 동시에 어떤 것들은 제대로 쌓이지 못한 채 흘려보내기도 했던 것 같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일본 브랜드들이 다시금 각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아이템을 하나씩 까보면 '엄청나게 새롭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다. 큰 로고나 과격한 디자인보다는, 오래된 역사와 공법, 소재에 대한 집요함, 그리고 장인정신에 가까운 태도로 '기본을 끝까지 밀어붙인 물건'들이 많다. 새로움은 과장된 형태가 아니라, 완성도의 형태로 다가온다. 처음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오래 입을수록 '이게 진짜구나'가 체감되는 종류의 옷들이다.
이 흐름은 한국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 제조업 기반이 이미 많이 무너지고 있다. 공장과 기술 인력이 줄고, 생산의 노하우가 해외로 흩어지며, 산업의 허리가 얇아지고 있다. 그러니 '장인정신 기반의 고품질 아이템'이 다시 주목받는 현상이 이상하지 않다. 우리가 잘 못한다기보다, 우리가 그걸 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트렌디하고 값싼 아이템과 브랜드만을 양산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트렌드가 힘을 잃는 순간, 남는 것은 결국 '쌓인 것'이다. 역사든, 품질이든, 제작의 태도든,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속성이다. 지금은 K의 물결이 흐르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성공 스토리' 혹은 '시간의 축적'을 기반으로 지속성을 추구해야 하는 단계에 이를 것이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무엇을 꺼내 보여줄 수 있을까. 빠르게 만든 이야기 말고, 오래 견딘 이야기. 유행에 올라탄 성과 말고, 시간이 증명한 가치.
레밍턴 스파의 공기는 여전히 느리고 단정하다. 10년 전의 기억을 들고 다시 걸어보니, 이 도시가 특별한 이유는 새로워서가 아니라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경쟁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때를 준비하자는 말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지금부터 하나씩 쌓아야 하는 실무의 언어에 가깝다. 느리더라도, 깊게. 유행을 쫓되, 뿌리를 잃지 않게. 그게 다음 10년을 살아갈 방식일지도 모른다.
< 저작권자 ⓒ 어패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