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택] 실과 원사, 산업의 뼈대를 이루는 보이지 않는 경쟁력

발행 2025년 11월 03일

어패럴뉴스 , appnews@apparelnews.co.kr

오진택의 ‘섬유의 민족’

 

 

우리가 매일 입는 옷은 원단, 바느질, 마감이라는 세 단계를 거쳐 완성되지만, 그 밑바탕에는 ‘실’과 ‘원사’라는 두 개의 주역이 존재한다.

 

‘원사(Yarn)’는 섬유를 꼬아 만든 가늘고 긴 선이다. 면, 폴리에스터, 나일론, 스판덱스 같은 원료 섬유를 일정한 굵기와 강도로 방적(紡績)해 만들어진다. 이 원사가 모여 직물과 니트를 구성하며, 우리가 ‘천’이라고 부르는 모든 소재의 출발점이 된다. 즉, 원사는 섬유산업의 중간재이자 소재산업의 핵심이다.

 

원사의 경쟁력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원료의 품질과 방적 기술, 설비 효율이 그것이다. 한국의 방적 기술은 1970~80년대 수출산업화 과정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2000년대 이후 중국, 베트남, 인도 등 신흥국의 대규모 저가 생산이 늘면서, 국내 원사 산업은 비용 경쟁에서 밀려났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기업은 고기능성·친환경 원사로 눈을 돌렸다. 리사이클 폴리에스터, 바이오 베이스 원사, 항균·방염 기능 원사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폐페트병에서 추출한 재생 폴리에스터 원사가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공급망에 속속 채택되고 있다. 원사 단계에서의 친환경화가 기업의 ESG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Thread)’은 원사를 재봉용으로 가공한 제품이다. 표면이 매끄럽고 마찰에 강해야 하며, 일정한 꼬임과 장력을 유지해야 바느질 중에도 끊어지지 않는다.

 

한 벌의 옷에서 실이 차지하는 비율은 적지만, 제품의 내구성과 완성도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봉제용 실의 품질은 고속 미싱 환경에서도 안정적인 봉제가 가능한지로 평가된다. 특히 기능성 의류, 자동차 내장재, 산업용 섬유에서는 내열성·내마모성·자외선 저항력 같은 특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이유로 글로벌 시장에서는 ‘고강력 폴리에스터 실’, ‘나일론 복합사’, ‘케블라 내열사’ 등이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실 생산 기업들은 과거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에 의존했으나, 최근에는 기술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다. 자동차용 안전벨트 봉제사, 군수용 방염사, 의료용 봉합사 등 산업용 실 시장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이 분야는 단가가 높고, 진입 장벽이 높기 때문에 중소기업에 기술 기반의 성장 기회를 제공한다.

 

‘원사’와 ‘실’을 구분하는 일은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섬유산업의 공정 단계와 가치사슬(Value Chain)이 숨어 있다. 원사는 대규모 설비 중심의 B2B 소재 산업에 속하고, 실은 소비자와 맞닿는 B2C 완제품 단계에 가깝다. 즉, 한쪽은 산업재, 다른 한쪽은 공예·디자인·기술이 결합된 정밀재다.

 

한국 섬유산업의 구조적 과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국내는 여전히 원사 중심의 중간재 수출 비중이 높다. 하지만 원사 단가 경쟁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반면 봉제용 실, 기능성 재봉사, 스마트 섬유 등은 소량 고가 시장이자 기술력이 수익을 좌우하는 영역이다. 이제는 단순한 원사 생산을 넘어, 후가공과 응용 기술이 결합된 실 시장으로의 이동이 필요하다.

 

일본의 후지보, 독일의 구터만(Gütermann), 미국의 코츠(Coats) 같은 기업들은 이미 이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들은 단순히 실을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 맞춤형 봉제 솔루션을 함께 제공한다. 내열성, 전도성, 방염 기능이 결합된 기능성 실(thread)을 통해 자동차, 항공기, 전자소재 등 새로운 산업군으로 확장했다. 그 결과 이들의 실 제품은 의류용보다 오히려 산업용 매출 비중이 높다.

 

한국 역시 가능성은 충분하다. 폴리에스터 고강력사, 탄소섬유 복합사, 리사이클 섬유 등 기초소재 분야의 기술력은 세계적 수준에 가깝다.

 

문제는 그 기술이 ‘원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실로 이어지는 응용 기술, 즉 가공·염색·봉제 적합성 설계 역량을 강화해야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산업계에서는 이미 움직임이 시작됐다. 국내 섬유 대기업들이 원사·직물 일변도에서 벗어나, 봉제용 실과 기능성 섬유 소재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AI 기반 품질관리 시스템, 저탄소 방적 공정, 수용성 합사 기술 등도 주목받고 있다.정부 차원의 ‘섬유 소재 고도화 지원사업’ 역시 이 같은 방향과 맞닿아 있다.

 

결국 ‘원사’는 산업의 출발점, ‘실’은 완성의 기술이다. 이 둘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산업적 가치가 창출된다. 섬유산업이 더 이상 단순 제조업이 아닌 기술·소재·디자인이 융합된 산업 생태계로 나아가려면, 원사와 실 사이의 단절을 잇는 연결고리 즉 가공·응용·융합 기술이 필요하다.

 

섬유 한 올의 차이는 미세하지만, 그 위에 얹힌 기술의 두께는 결코 작지 않다. ‘실과 원사’의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옷감이 아니라 국가 산업의 구조와 혁신의 방향을 함께 읽게 된다. 한국 섬유산업의 다음 장은 그 한 올의 실, 그리고 그 밑단의 원사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오진택 에이엠랩 대표

 



< 저작권자 ⓒ 어패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카카오톡 채널 추가하기 버튼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광고배너 이미지

지면 뉴스 보기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
지면 뉴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