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용의 ‘패션 디자이너의 세계‘
한국 패션 산업은 오랫동안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을 통해 성장해 왔다. 영원무역, 한세실업, 세아상역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해외 브랜드의 생산 파트너로서 축적한 기술력과 생산 효율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는 한국 패션의 가장 큰 경쟁력 중 하나다. OEM은 단순한 ‘하청’이 아니라, 한국이 글로벌 패션 시장 안에서 존재감을 키워온 중요한 토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국만의 브랜드와 스토리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할 단계에 왔다. 지금의 산업 구조에서는 많은 공장과 기업들이 여전히 해외 브랜드의 오더에 의존하고 있다.
신진 디자이너들이 자체 브랜드를 키우기에는 자본·유통·마케팅 면에서 현실적인 벽이 높다.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OEM 수주로 생존을 이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내 시장도 만만치 않다. 합리적인 가격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특성상 고유한 콘셉트와 높은 제작비를 가진 디자이너 브랜드가 내수 영업만으로 안정적인 입지를 다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일부 브랜드들은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은 뒤 국내로 역진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인식 변화다. 단순히 ‘가격’과 ‘트렌드’ 중심의 소비를 넘어 브랜드가 가진 스토리·제작 과정·가치에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소비자들이 브랜드의 철학과 진정성에 반응할 때,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더 큰 무대에서 자생력을 갖게 된다. ‘좋은 옷’을 고르는 기준이 단순한 가격 경쟁력이 아니라, 브랜드의 태도와 메시지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미 세계 유수 브랜드들이 한국 생산력을 신뢰하고 있는 만큼, 이 기반 위에 독자적 브랜드를 세울 기회는 충분하다.
만드는 쪽의 기업 윤리 의식과 책임감도 중요하다. 빠른 납기와 단가 경쟁에만 몰두하기보다, 좋은 제작 환경을 만들고, 창작자와의 정당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OEM 기업과 디자이너 브랜드가 상생할 수 있는 구조가 자리 잡는다면, 단순한 생산 기지를 넘어 ‘브랜드를 키우는 산업’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는 국내외 소비자 모두에게 신뢰를 주는 기반이 된다. 생산과 창작, 유통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K-패션의 지속 가능성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OEM은 한국 패션의 강력한 기반이다. 그 기반을 약화시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토대 위에 브랜드와 콘텐츠 생태계를 함께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력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가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디자이너, 제조업체, 유통, 소비자가 함께 시야를 넓힐 때, K-패션은 제조 강국을 넘어 ‘브랜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
또한 해외 생산 역시 한국 브랜드에게 중요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이미 많은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원단 수급, 생산 단가, 기술력 등을 이유로 이탈리아, 중국, 베트남 등 다양한 생산지를 활용하고 있다. 국내 생산만으로는 가격 경쟁력이나 규모 면에서 한계가 있어, 해외 생산을 전략적으로 조합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면서도 글로벌 시장 대응에도 유리하다. 결국 생산지의 ‘국내 vs 해외’보다는 브랜드의 방향성과 품질 관리 능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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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태용 비욘드클로젯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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