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경] 패션모델은 근로자가 아니라고? 체불 체념의 굴레
발행 2025년 0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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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의 ‘패션法 이야기’
사람은 돈의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일을 하고 돈을 못 받을 때는 노예보다도 비참하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오늘날 패션계에서도 자괴감에 헤매는 영혼들이 많다. 패션모델들은 모래알 같은 직업군이라서 더 깊은 사각지대에 빠져있다. 어떻게 해야, 모델 일을 하고 제때 돈을 받으면서 패션계에서 모델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연초에 어느 외국인 패션모델의 애환이 담긴 영상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았다. '한국에서 모델 일 하는 일본 여성들이 겪은 일'이라는 유튜브 영상은 한국 생활 2년 차 일본 모델이 패션계에서 돈을 못 받은 애환을 담았다. 모델이 먼저 입금에 대하여 업체에 말하지 않는 이상 입금 자체를 아예 까먹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많은 모델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모델 생활에 회의를 느낀다는 것이다. 의뢰 당시에 모델 업무에 대한 금액을 미리 결정한 이후에도 촬영 후에 시간당으로 계산하여 감액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그들을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업체들은 이런 악습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경우, 입법 시스템과 업계의 자체 정화를 통하여 모델에 대한 처우 개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몇 년 전 LA의 한인 의류업계들은 현지 패션모델들의 노동 소송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모델 에이전시들 소속 모델들을 고용해서 의류업체의 브로셔, 카탈로그에 나오는 모델들을 촬영한 한인 의류업체들은 현지 모델들의 변호사로부터 수십만 달러의 소송을 당했다. 한인 업체들은 이미 모델 에이전시에게 촬영 당시에 이미 모델료를 지불했지만, 모델 에이전시들이 그 모델료를 모델에게 지급하지 않은 상황에서 파산했거나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모델들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한인 의류업체를 상대로 법률적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모델 일당 뿐 아니라, 일당의 30배인 대기시간 벌금(Waiting time penalty)까지 인정되니까 무시무시한 처벌인 셈이다. 미국 노동청의 유권해석에 따라 일종의 징벌적 배상처럼 운용되는 클레임 체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80년 캘리포니아주 항소법원 판례인 Zaremba v. Miller에 따라 오래 전부터 업계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법원은 해당 패션모델의 고용주를 에이전시가 아니라 이 모델의 업무과 시간을 통제하는 사진업체나 의류 업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법리, 판례를 모르는 많은 한인 업체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패션모델이 독립 사업자/계약자가 아니라, 의류업체의 종업원의 지위를 갖는다니. 우리나라 법 시스템이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은 패션모델을 비롯한 업계 인력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두텁게 보호하고 있다.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단지 외국인 모델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내국인 패션 모델들도 수당 체불에 따른 경제적, 정신적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노동청에 체불에 따른 신고도 해보지만, 우리나라 노동법상 패션모델의 지위는 근로자가 아니라고 유권해석 및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노동법에 따른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모델 본인이 각자 알아서 전자소송을 제기하라고 조언할 뿐이다. 모델료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소송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기약 없는 체불에 한없이 체념하고 있다.
상생, 동반성장을 아무리 외친들 약자들에게 체불은 그저 공염불이다. 선진국처럼 체벌에 가까운 시스템으로 뿌리 깊은 폐해를 도려내야 한다. 체불 체념에 더 깊게 빠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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